흰 바람벽이 있어
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
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
이 흰 바람벽에
희미한 십오촉(十五燭)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
때글은 다낡은 무명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
그리고 또 달디단 따근한 감주나 한잔 먹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.
또 이것은 어인일인가
이 흰 바람벽에
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
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
이렇게 시퍼러 둥둥하니 추운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
또 내사랑하는 사람이 있다
내 사랑하는 어여쁜이 사람이
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에 나즈막한 집에서
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아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
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
그런데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
이 흰바람벽에
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
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
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
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
내 가슴은 너무도 많은 뜨거운 것으로 호젖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
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듯이 나를 울력하듯이
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
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
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
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
그리고 "프랑시쓰 쨈'과 도연명 과 "라이넬 마리아 릴케" 가 그러하듯이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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몇 달을 가슴 속에 맺힌 말을 해내고 끝을 모르고 가라앉는 마음을 어찌해야할 지 모르겠다.
그러다가 문득 이 시가 생각났다.
원래도 아는 시였지만 영아언니가 차분한 목소리로 나에게 읊어준 적이 있다.
저 시구때문인지 계속 맴돈다.
"흰 바람벽이 있어."
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파리로 다시 돌아가 파리의 마지막 밤 저녁을 먹었던 이 곳에서 다시 저녁을 먹으면 된다는 생각이 더 가라앉는 마음을 겨우 붙잡는다.